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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동의수세보원』의 구절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성명론」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1-37. 存其心者, 責其心也. 心體之明暗, 雖若自然, 而責之者淸, 不責者濁. 馬之心覺黠於牛者, 馬之責心黠於牛也. 鷹之氣勢猛於鴟者, 鷹之責氣猛於鴟也. 心體之淸濁, 氣宇之强弱, 在於牛馬鴟鷹者以理推之, 而猶然, 況於人乎? 或相倍蓰, 或相千萬者, 豈其生而輒得? 茫然不思, 居然自至而然哉!
1-37. 마음을 붙잡는다(存心) 하는 말은 마음을 꾸짖는다(責心)는 뜻이다. 마음 그 자체의 밝고 어두움이 비록 저절로 흘러가기는 하지만 꾸짖는 자는 맑아질 것이요, 꾸짖지 않는 자는 탁해질 것이다. 말의 마음의 지각이 소보다 민첩한 것은 말의 책심이 소보다 민첩하기 때문이다. 매의 기세가 부엉이보다 사나운 것은 매의 책기가 부엉이보다 사납기 때문이다. 마음의 청탁이나 기개의 강약이 소나 말, 부엉이나 매의 사례로 추측해 보아도 이미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간혹 곱절이나 댓 곱절도 차이가 나며 간혹 천이나 만배도 차이가 나는 것이 어찌 태어나서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멍하게 아무 생각없이 흘러가는대로 내버려두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 문장은 「성명론」이라는 강론을 모두 마무리한 후 나가려는 수강생을 붙잡고 하는 최종적인 당부의 말 같은 것입니다. 진짜 모르겠으면 이것만 기억하라, 결국 내가 하고자 한 말은 쉽게 말해서 이런거다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어요.
결국 「성명론」에서 말하고자 한 이제마의 이야기는 “책심責心”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됩니다. 펼치면 천인성명의 철학논문이 되지만 모으면 책심이란 경구에 다 담깁니다. 이 말이 「성명론」의 어려운 철학적 논설을 통해 하고 싶었던 최종적 일언一言이었습니다.
“책심責心”은 마음을 책망하다, 즉 마음을 꾸짖는다는 말입니다.
“힐黠”은 약다, 영리하다는 뜻입니다. 소는 하루 8시간씩 풀을 뜯어요. 먹는 시간 외에는 거의 멍때리며 쉬는데 시간을 보냅니다. 몸이 둔한 것은 마음이 둔하기 때문입니다. 소가 둔한 것은 곧 마음을 책망하지 않고 나태하게 내버려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응鷹”은 매입니다. “치鴟”는 올빼미, 부엉이, 솔개 등을 뜻합니다. 부엉이는 올빼미과에 속하나 솔개는 수리과입니다. 각각 조금씩 특징이 달라요. 지금은 흔치 않으나 과거에는 모두 한국에서 두루 볼 수 있는 조류였습니다. 한두정은 솔개라 훈을 했지만 저는 보다 친근감있는 부엉이로 번역했습니다. 부엉이는 야행성입니다. 낮에는 물체를 거의 못본데요, 그래서 맨날 대낮에 꾸벅꾸벅 조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왜 부엉이는 매처럼 빠릿빠릿하지 못한 걸까요? 동무는 부엉이가 스스로 “책기責氣”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책기는 책심과 동일한 내포를 갖습니다. 그런데 책심 대신 책기를 쓴 것은 사람과 같은 심心의 작용을 포유류까지만 인정했기 때문이라 짐작됩니다. 조류는 심의 작용이 미미하다고 본 것 같아요. 그래서 조류에는 보편적인 언어인 기氣를 사용했습니다. 책심은 책기에 포섭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무는 이런 비유를 통해 인간의 책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마음을 흘러가는대로 내버려두지 말라! 책심으로 마음의 청탁은 천양지차가 난다. 인간은 망연茫然하면 자실自失할 수밖에 없는 사심邪心과 태행怠行의 존재다. 멍때리지 말라. 마음을 꾸짖고 또 꾸짖어라. 학문이란 다른게 아니다. 구기방심일 뿐이다! 책지자청責之者淸이요, 불책자탁不責者濁이라! 우리는 자책해야 합니다. 하루도 쉬지않고 자책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명론」의 메시지입니다.
현재 이제마의 유일한 친필로 추정되는 편지글. 대략 170자 정도이며 대구 인근에 있던 최씨라는 인물에게 선산 문제 등 집안 대소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작성일인 경인년(1890) 10월 3일은 이제마가 진주성에 머물던 시기이다. 필체에 힘이 느껴진다. 이경성 촬영.
하나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단론」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중용』 1장의 해설로 대미를 장식합니다. 결국 「사단론」의 주제는 희노애락의 중절中節입니다.
2-26.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喜怒哀樂未發而恒戒者, 此非漸近於中者乎? 喜怒哀樂已發而自反者, 此非漸近於節者乎?
2-26. 『중용』에서 “희노애락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중이라 하고 일어나서 상황에 다 들어맞는 것을 화라 한다”고 하였다. 희노애락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 항상 경계한다면 이것이 점점 중에 가까이 가는 것 아니겠는가? 희노애락이 이미 일어났을 때 스스로 돌아본다면 이것이 점점 절에 가까이 가는 것 아니겠는가?
희노애락은 미발과 이발의 차이만 있을 뿐 늘 내 안에 존재하고 작동합니다. 동무는 「사단론」을 통해 그것이 생명의 기저라는 놀라운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본절은 희노애락이 아직 발생하지 않을 때 항상 경계하라고 합니다. 나의 희노애락을 늘 애지중지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마치 생명의 불씨인 것처럼 보호감찰해야 합니다. 또한 희노애락이 밖으로 나오면 즉각 따라붙어야 합니다. 희노애락의 발출이 없는 인간은 죽은 인간입니다. 희노애락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면 상황에 어긋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요순이 아닐진대 어찌 인의예지가 사사건건 선善을 다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공맹이 아닐진대 어찌 희노애락이 구구절절 중中일 수만 있겠는가? 그런데 비록 선하진 않더라도 그렇게 크게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이미 선에 가깝다 할 것이다. 비록 절節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크게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이미 절에 가깝다 할 것이다. 이와같이 해나간다면 자연히 흉凶을 피하고 길吉로 향해 위험을 면할 것이요, 마침내 오장이 완전해지고 행복과 장수를 누리게 될 것이다.
人非堯舜, 何能仁義禮智事事盡善? 人非孔孟, 何能喜怒哀樂節節必中? 雖不善也, 不太不善, 則己近於善矣. 雖不節也, 不太不節, 則己近於節矣. 如此做去, 則自然避凶趍吉免危, 而祗安五臟完而福壽至矣.(권3-11)
동무는 요순과 공맹을 꿈꾸는 이상주의자입니다. 그러나 현존의 나를 외면하지 않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합니다. 동무가 참으로 하고 싶은 말은 길흉화복과 수명이 모두 내 안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길흉을 알기 위해 점을 칠 필요가 없습니다. 복을 기원하기 위해 하늘에 빌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의 도덕과 감정을 지키는 삶이 행복과 건강의 초석입니다. 동무는 그 인간의 인의예지와 희노애락을 살펴보면 점괘없이도 기원없이도 길흉화복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화복禍福이라는 것이 자기 스스로 자초하지 않은 것이 없다.
禍福無不自己求之者.(『맹자』「공손추」상4)
희노애락의 항계, 자반은 단순한 도덕적 책무를 넘어 건강과 생명을 좌우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기존 유학과 차별되는 동무 사유의 독특처라 할 수 있습니다. 『동의수세보원』을 읽고 희노애락이 생기기 전에 경계하며 희노애락이 생기고나서 반성할 수 있다면 그는 건강과 장수의 비법을 터득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팔작 맞배지붕을 가진 정면 7칸, 측면 3칸의 동헌. 진동면사무소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현감이 공무를 집행하던 곳으로 이제마는 1887년 2월부터 1889년 12월까지 2년 10개월을 이곳에서 보냈다. 이제마의 거취가 확실한 거의 유일한 장소이다.
마지막으로 「장부론」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동무는 장부의 전 체계를 장악하고 감독하는 근원적인 힘은 바로 심心에서 나온다고 설파합니다.
4-17. 心爲一身之主宰, 負隅背心, 正向膻中. 光明瑩徹, 耳目鼻口無所不察, 肺脾肝腎無所不忖, 頷臆臍腹無所不誠, 頭手腰足無所不敬.
4-17. 심은 내 몸의 주재자다. 각진 등 한가운데서 가슴의 정중을 향하며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면 이목비구는 살피지 못하는 게 없고 폐비간신은 헤아리지 못하는 게 없고 함억제복은 성실하지 못한 게 없고 두수요족은 공경스럽지 못한 게 없게 된다.
동무는 「장부론」에서 천인지행이 주관하는 사해四海의 생리도를 완성하면서 마지막으로 심心을 말합니다. 이는 「성명론」의 구도와 일치합니다. 「성명론」은 천인지행의 구조를 설파한 후 마지막에 책심責心을 말했습니다.
「성명론」이 유학적인 구조에서 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장부론」은 의학적인 구조에서 심을 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부론」은 「성명론」의 의학적 변신입니다. 「장부론」은 생명의 중심이 심이라고 말합니다. 심장이 내 몸의 주인이라고 말합니다. 일관된 동무의 논리가 장부생리론에도 그대로 베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자가 제자인 자공에게 말했다: “사야, 너는 내가 많이 배우고 많이 기억하는 자라고 생각하느냐?” 자공이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아니십니까?” 이에 공자가 말했다: “그래, 아니다. 나는 하나로 꿰뚫은 자니라.”
子曰: “賜也, 女以予爲多學而識之者與?” 對曰: “然, 非與?” 曰: “非也. 予一以貫之!”(『논어』「위령공」2)
동무는 박학다식을 자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동무는 하나로 꿰뚫고자 하는 자입니다. 그 하나를 읽지 못하면 동무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부우負隅”는 모서리를 등지고 버티고 있는 모습입니다. “부우배심負隅背心”이란 심장의 입장에서 후방으로 각진 등 한가운데 위치한다는 의미입니다. “정향전중正向膻中”은 전방으로 가슴 한가운데를 바라보며란 뜻이 됩니다. 심장이 앞뒤로 몸통의 한가운데 위치한다는 표현입니다. 「사단론」의 “五臟之心, 中央之太極也”(2-3)를 생각나게 합니다.
“광명형철光明瑩徹”이란 빛이 구석구석 빈틈없이 파고드는 모습입니다. 심장은 태양입니다. 태양이 지구를 구석구석 내리쬐며 생명을 기릅니다. 심장이 내몸을 빈틈없이 비춰주며 생명이 자라납니다. 심장이 온몸을 밝혀줍니다. 「사단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심욕에 가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심장은 원래 찬란하게 빛납니다. 그러나 심욕이 그 빛을 가릴 수 있습니다. 심욕을 완전히 걷어내면 심장은 형형하게 빛나서 온몸을 밝힙니다. 「장부론」은 심욕의 제어가 인간의 도덕은 물론 건강에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의학적으로 분명하게 표방하고자 합니다.
심이 중앙에서 빛나면 이목비구는 살피지 못할게 없습니다. 폐비간신은 헤아리지 못할게 없습니다. 함억제복은 성실하지 못할게 없습니다. 두견요둔은 공경스럽지 못할게 없습니다. 심장이 이목비구, 폐비간신, 함억제복, 두수요족이라는 네 개의 말고삐를 모두 틀어쥐고 있습니다. 심장은 천인지행이라는 신하를 거느리는 군주라 말할 수 있습니다. 임금이 제자리를 잡으면 신하가 바로 서고 백성이 편안해집니다. 심장은 군주지관君主之官이라는 전통의 학설을 동무만큼 확실히 이론화시킨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이진윤이 1947년 월남할 때 이제마의 함흥 본가에서 찍어 온 초상화. 후손들이 기억을 되살려 1920년대 그린 것이라 한다. 태양인 특유의 노기어린 눈매가 잘 표현되어 있다. 그림에는 “선생께서는 의약의 경험이 있은 지 5, 6천 년이 지나서 태어나셨다. 옛사람의 글을 읽다 우연히 사상인으로 구분되는 장부臟腑의 성리性理를 깨달으시고 책을 한 권 짓고는 『수세보원』이라 이름하셨다. 또 『격치고』도 저술하셨다.”고 쓰여 있다.